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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북뉴스

8. 김은애 살인사건: 임금의 칭찬을 받은 살인

살인사건이라고 하니 은근 현대물(?)인 것 같지만 제가 하는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아녀자의 살인사건입니다. 그것도 아주 잔혹한 살인이죠. 때는 정조 14 8. 전라도에서 살인범 김은애에 대한 보고가 올라옵니다. 김은애라는 전라도 강진의 양반집 딸이 근처에 살던 퇴기 안조이라는 인물을 칼로 난자한 사건이지요.

                                                                        <김은애 살인 사건 기록>

신분 질서가 분명하고 남녀 유별이 강력한 이 시대에 아녀자가 다른 신분인 기생을 칼로 잔혹하게 살해한 이 사건은 상당한 이슈가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판결 또한 예상과는 다르게 무죄 판결을 넘어 오히려 왕의 칭찬을 받게 되는 희한한 상황으로 번지게 되는 사건이지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전라도 강진에 사는 양반집 딸인 김은애와 퇴물 기생 안조이는 이웃에 사는 사이였습니다. 평소 부유한 김은애의 집에 안조이가 종종 양식을 꾸러 왔는데, 이 안조이는 옴이 걸려서는 가려울 때마다 독설을 내뱉는 행실이 좋지 않은 자였습니다. 김은애의 어머니는 안조이가 양식을 꾸러 올 때 종종 그녀의 문제들 때문에 양식 주기를 거부했는데 안조이는 이에 대해 앙심을 품었습니다.
그리고는 보복할 마음에 안조이와 인척 관계인 십대 중반의 최정련이라는 소년을 왕년 기생의 능력으로 꼬셔 음탕한 마음을 품게 하여 김은애를 사모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최정련은 김은애가 딴 곳에 시집가지 못하고 자신에게 오도록 안조이와 공모해 더러운 소문을 퍼뜨리죠. 안조이는 그 대가로 옴 약 값을 요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성에 대한 제한이 많은 시절에 좋지 못한 소문이 퍼져 나오자 김은애 집안은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요즘에도 좋지 못한 소문은 혼삿길 막는 첫 번째 이유인데 더더구나 조선시대에, 그것도 양반 집안의 아녀자에게 그런 소문은 커다란 타격이었죠. 하지만 같은 동리에 사는 김양준이라는 인물은 김은애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며 그녀와 결혼을 합니다.
이러니 최정련은 닭 쫓던 개꼴이 되어버렸고 화가 나서 안조이에게 “일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약 값은 줄 수 없다.” 하며 버텼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앙심을 품고 일을 벌이던 안조이는 더욱 더 화를 내었고 무려 2년간 줄곧 악담을 퍼뜨려 인근 동리에까지 김은애에 대한 악평이 자자하게 되었죠.
처녀 때부터 모함에 시달린 김은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더더구나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조차 아는 상황이라 김은애는 화가 폭발해서 부엌에서 식칼을 찾아 들고 안조이를 찾아가 수십 회 난자해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최정련까지 죽여버릴 마음을 품고 최정련의 집으로 가던 중 친정어머니를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고 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하자 최정련까지 죽이는 것은 그만두었죠.

남자의 살인도 심각한 때에 아녀자가 식칼로 잔혹하게 타인을 죽인 사건은 강진 고을을 발칵 뒤집어놨습니다. 그 즉시 이장이 김은애를 고발하고 수령은 김은애를 잡아들였죠. 김은애는 별다른 저항 없이 체포되어 순순히 모든 범행을 자백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맑은 정신으로 거짓 모함으로 이런 사건을 벌인 최정련에 대한 사형까지 요구합니다. 일단 사람을 죽인만큼 조선의 법률에 따라 이 보고는 현감과 관찰사를 거쳐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었습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토론이 벌어집니다. 비록 살인의 사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고발을 통해 안조이를 무고죄로 넣을 수 있음에도 사사로이 살인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법률에 따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 여론의 중핵이었습니다. 당대 명재상이었던 채제공도 법에 따른 절차가 있음에도 사사로이 살인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이를 용서하게 되면 법치가 흐트러진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정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정조는 “김은애의 행동은 의가 충만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는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며 모함에 대한 정당방위이므로 용서해주어야 한다. 여자가 음탕하다는 음해를 당하는 것만큼 큰 아픔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미 이전에 해서 지방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도 용서해준 사례가 있다.”라는 말로 김은애에 대한 석방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무죄를 판결함과 동시에 최정련에게 김은애에 대하여 다시는 음해하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하도록 명합니다.

 

                                                                                  
     <정조 대왕>

재미있는 일이죠? 요즘이라면 있을 수 없지만 당시에는 임금이 하명하여 특별히 용서를 해줄 수 있는 일이었는지라 김은애는 살인을 하고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정조는 이 일을 그냥 “용서해줘라” 정도로 끝낸 게 아니라 의외로 다양한 수사를 동원해 칭찬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다 규장각검서관 이덕무에게 이 일을 편찬해 『은애전』을 만들어 널리 알리라고까지 말하죠.
사실 좀 특이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아예 전례가 없던 일도 아니었고 그 사건 자체가 정치적으로 특별한 연관을 지닌 것도 아님에도 정조가 이렇게 반응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조의 아픔과 관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함으로 뒤주 속에서 죽었지요. 당시 11세였던 정조는 이 사건을 너무나 깊게 가슴에 묻고 있었습니다. 사실 정조는 이 사건을 생각해볼 때, 이후 폭군으로 변해도 무방할 정도였지요.
때문에 정조는 ‘모함’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 사건을 크게 이야기하고 공론화함으로써 “모함을 하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것과 동시에 “모함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가 다시 나오지 않게 하겠다.”라는 선언이기도 한 것이죠. 정조 시대 몇몇 사건들을 보면 정조가 모함을 당한 자들은 살인을 저질러도 이해를 해주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지요.

사실 명군이든 위인이든 이렇듯 인간의 아픔 정도는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가끔 위인전을 보면 위인들은 무슨 사람이 아닌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도 종종 있던데 그들도 결국 사람이고 사람의 아픔을 이해 못하는 자는 명군도 위인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역사/문화]  조선의 속사정
권우현 | 원고지와만년필
2013.04.15
 

알고 보면 지금과 비슷한 '조선의 속사정'
조선시대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만우절이? 예나 지금이나 술이 문제였다고? 애연자와 혐연자의 담배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노비에서 왕까지, 조선을 이루었던 모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진정한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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