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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북뉴스

11. 추노에서 나온 종이갑옷: 지갑(紙鉀)

드라마 ‘추노’에 푹 빠진 적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같은 감독의 ‘한성별곡’도 끝내준다고 하더군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소위 개념작이란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방송에서 드라마를 두고 선정적네 뭐네, 심지어 동물보호단체에서는 개를 먹는 게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는데 “그 주둥이를 닥치지 못할까!”라고 해주고 싶습니다. 아니 그럼 조선시대 하층민의 삶을 표현하는데 예의가 넘쳐나고 소고기에 돼지고기 먹으며 우정과 의리가 그득한 거짓부렁을 하는 게 정상이란 말인가요.
 
아무튼 추노 4화에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대길이 송태하 추적의 명을 받고 돈을 왕창 받아온 날, 최장군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대길을 추궁하다 방에 들어가 지갑을 들고 나옵니다. 돈 넣는 지갑이 아니라 가슴에 차는 흉갑을 가지고 나온 것이죠.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가볍기는 비단과 같고 단단하기는 무쇠와 같은 갑옷이니 나이든 사람의 걱정이라 생각하고 착용하라고 합니다. 일전에 대길과 태하가 맞붙은 뒤, 상대가 정치적인 문제들과 얽혀 만만치 않음을 짐작했기 때문이었죠.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대한민국 드라마에서 지갑까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 정도 고증이면 상당히 수준 높은 드라마라고 해도 무방하죠. 이보다 더 높아지면 그건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겠죠. 하여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서 나온 이 지갑, 소위 ‘종이갑옷’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이 드라마의 배경은 조선 중후기입니다만 사실 이 지갑은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 이 지갑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갑의지는 전쟁터에서 화살을 막는 갑옷에 쓰인 종이다. 화살을 막기 위해서는 물론 철판을 써야 하지만, 철판은 무겁기 때문에 대신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철판 못지않은 갑의지를 썼다.’라고 합니다. 즉 무거운 철판 대신 가볍고 단단한 종이갑옷을 만들어 썼다는 이야기지요.
 
이 지갑은 한지로 만들 수 있는데 한지가 섬유질이 풍부한 닥나무로 만든 닥종이여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무의 섬유질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에 두께나 용도에 따라 다양한 목적의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온돌방에 바르는 두꺼운 형식의 온돌지나 문이나 창에 쓰이는 후지 등은 닥지를 여러 겹 발라 두껍게 만든 것이고, 일반적으로 붓글씨를 쓸 때나 그림 그릴 때 쓰는 한지는 세화지라 해서 섬유질을 되도록 잘게 부수고 얇게 만들어 먹이 잘 스며들고 일정하게 퍼지도록 만든 종이지요.

 


지갑을 만드는 종이는 한지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어차피 종이 한 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가끔 이렇게 지갑이나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기 위해 책 등을 도둑질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책이 귀한 시대라 책은 양반집에서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걸 털어가서 딴 용도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보면 요즘 도로 가드레일 떼어가는 도둑놈들의 기원이 상당히 깊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무튼 이런 종이를 원하는 형태로 자르는 것이 첫 번째 일입니다. 위의 드라마에서는 흉갑과 같은 모양입니다만 종이라는 것이 만들기 나름인지라 일반 갑옷 속에 넣을 철편 대신 이 지갑편을 넣는 경우도 있었고 취향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만들 수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조선의 갑옷은 겉이 아니라 속에 철갑 등을 붙이는 방식을 취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잘라진 종이에 옻칠을 합니다. 옻칠을 하는 이유는 접착제의 역할도 있지만 불과 물에 강하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요. 그리고 이렇게 옻칠된 종이를 가로, 세로, 대각선 방향으로 섬유질이 서로 교차하게 붙여나갑니다. 한쪽으로만 붙이면 나뭇결처럼 쫙 잘라져버리겠죠?
 
그 다음 이렇게 만든 종이를 바람에 말리고 완전히 말라 굳으면 다시 종이 바르기와 옻칠을 해서 앞과 뒤를 한 번 더 만들어줍니다. 이 과정을 통해 갑옷의 형태가 완성되고 두께가 만들어져 갑옷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만든 형태를 며칠 정도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말려주면 지갑이 되는데 예전 KBS에서 실험한 바에 따르면 10미터 거리에서 국궁으로 1mm 두께의 갑의지에 화살을 날려도 화살만 부러질 뿐 관통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칼로 베어도 흠집만 날 뿐 갑옷이 영향을 받는 경우도 없었다고 하는군요. 당연히 옻칠을 여러 번 했기에 불에도 강했고 말입니다. 그리고 얇은 닥종이에 옻칠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방습성도 좋아서 국궁처럼 장마철에 접착제가 녹아내릴까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는군요. 거기다 철갑처럼 무겁지도 않았으니 많은 사람들이 지갑을 애용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하지만 이 지갑도 결코 값이 싼 편은 아니었습니다. 종이 자체도 귀할 뿐더러 여기에 바르는 옻 또한 고가라 실제로 만들어보면 철갑이나 지갑이나 결과물의 값은 그게 그거였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물론 철갑도 하나하나 열처리를 통해 엄청 고가의 것을 만들면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유럽의 고급 판금 갑옷들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을 착용할 수 없었으므로 가볍고 활동성 좋은 지갑이라는 강한 종이 갑옷이 나온 것입니다.
 
[역사/문화]  조선의 속사정
권우현 | 원고지와만년필
2013.04.15
 
 

알고 보면 지금과 비슷한 '조선의 속사정'
조선시대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만우절이? 예나 지금이나 술이 문제였다고? 애연자와 혐연자의 담배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노비에서 왕까지, 조선을 이루었던 모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진정한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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